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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장소’는 다 어디로 갔나

그 많던 ‘장소’는 다 어디로 갔나

이문재(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떤 사람이 온전한 삶의 주인이라면, 그 사람은 온전한 장소의 주인이다. 인간다운 삶은 장소다운 장소ㅡ의미 있는 장소에서 가능하다. 존엄, 품위, 경건, 공감, 공존, 상생, 지속가능성과 같은 가치와 태도는 장소다운 장소에서 비롯된다. 어떤 삶이 천박하다면, 그 삶은 열악한 장소와 밀접할 것이다. 어떤 사회가 공격적이라면, 그 사회의 장소가 배타적으로 구획되어 있을 것이다. 장소 없는 삶처럼 불우한 삶도 없다. 장소가 없는 사회처럼 불안한 사회도 없다.

하지만 장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현저하게 낮다. 장소에 대한 감수성이 놀라울 정도로 둔하다. 장소는 공간과 다르다. 인문지리학은 장소와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한다. 장소의 장소다움ㅡ장소성(placeness)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이야기다. 인간의 이야기(문화)가 온축된 공간이 장소다. 인문지리학이 말하는 공간은 인간의 이야기가 개입되지 않은 지표면이다. 마을이 장소라면 사막은 공간이다. 집이 장소라면 아파트는 공간에 가깝다. 장터나 재래시장이 장소라면 백화점이나 이마트는 공간이다. 공원이 장소라면 도로는 공간이고, 나루터가 장소라면 여객선터미널은 공간이다.

인간은 장소에서 태어나 장소에서 죽는다. 인간은 장소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장소에서 자아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획득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원초적인 장소가 집이다. 하지만 도시적 삶이 보편화하면서 집은 고유의 장소성을 잃고 말았다. 경제논리가 집을 주거 공간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둔갑시켰다. 사회적 성공이 소유의 크기, 소비 능력으로 측정되면서 장소성이 증발되고 말았다. 아무도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아무도 집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도시인에게 집은 이제 ‘짐 보관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집이 사라지자 마을이 사라졌다. 도시에서 공동체를 찾는 것은 북극해에서 기린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명의 역사는 오래된 마을을 도시로 빨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산업문명은 공간을 끊임없이 장소화해 왔다. 하지만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공간의 장소화는 역전되고 말았다. 도시가 건설한 장소에는 장소성이 없다. 도시의 특성을 말할 때 맨 먼저 등장하는 익명성도 장소없음(장소상실)에서 발생한다. 장소가 없기 때문에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익명성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건강한 장소에서 성장한다. 나는 장소 없는 민주주의는 언론 자유 없는 민주주의와 같다고 믿는다. 장소와 공동체는 불가분의 관계다. 좋은 장소가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좋은 공동체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낸다. 좋은 장소-공동체가 좋은 시민을 길러내고, 좋은 시민이 좋은 장소-공동체를 구현한다.

그렇다면 좋은 장소는 어떻게 가능한가. 도시에서 어떻게 좋은 장소가 가능한가. 답은 있다. 도시농업이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걷어내고 땅을 되찾는 것이다.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 노상 주차장 위에 지붕을 얹어 그곳을 밭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도시에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도로 위에 상판을 설치해(고가도로처럼) 그곳에 흙을 올리는 것이다. 종로에 논과 밭을 만들 수 있다. 강변도로에 과수원을, 순환도로에 양계장은 물론 양어장도 마련할 수 있다. 농장 빌딩은 벌써 실현되고 있다.

도시농업은 로망이 아니다. 단순한 취미, 여가생활이 아니다. 도시인이 땅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순간, 도시에 장소가 만들어지고 관계가 회복된다. 이웃이 생겨나고 공동체가 형성된다. 도시농업이 도시를 바꾼다는 사실은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 쿠바 등지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지난 해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을 넘어섰다. 지구 전체 인구가 증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도시 인구가 더 빠르게 늘어나는 것 또한 큰 문제다. 현재 지구 전체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서 살아간다. 일자리를 찾아 정든 땅을 떠나는 디아스포라와 함께 전쟁과 환경파괴로 인한 난민도 급증하고 있다. 도시농업을 통해 도시를 녹색화하는 사업은 한국사회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 도시 인구폭발이 야기하는 지구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농업이 미래다. 도시에서 땅의 의미와 장소의 기능을 재발견하는 도시농업이 도시의 미래다. 엠마 골드만은 일찍이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좋은 장소ㅡ공동체가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본 칼럼은 이문재 시인이 지난 6월 25일 '바람과물 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토대로 써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