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대화의 정신, 닫힌 사회를 열어내다


고대 그리스의 아케데모스 숲 속에서 철학자들이 벌였던 대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넘어 고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학문적인 영역에 머물러 현학적으로 되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한 갈등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아카데미란 아카데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성이어야 한다는 걸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거쳐 간 지성들이 그들이다.

중간집단 육성 프로그램의 단절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힌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간사 6명이 반공법 제4조 1항(용공서클 조직, 불온서적 탐독)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 끌려갔다가 구속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교육생 700여 명이 구금 혹은 문초를 당했다. 사무실은 수색영장도 제출하지 않은 중정 요원들에게 압수수색 당했으며 결국 당시 원장이었던 강원룡 목사도 중정에 연행되어 6일 동안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가 진행되던 동안 이 사건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4월 16일 중앙일간지들이 일제히 중정의 발표문 그대로 ‘불법 용공서클 일당 검거’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내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 사건의 공판은 매주 1회 혹은 2회씩 계속되었는데, 변호인 반대신문이 있던 7회 공판 때 구속자들에게 고문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폭로되었다.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 세계교회협의회(WCC), 독일교회연합회, 유럽에큐메니칼연합, 미국연합장로교회 등에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대표를 파견해 항의방문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들 단체 중 WCC는 크리스챤 아카데미와 연관이 깊은데,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1974년부터 건강한 중간집단 육성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WCC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단체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일까. 검찰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후원자인 WCC가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 시대는 WCC가 KGB의 손아귀에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통하던 시대였다.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아무런 확인 과정 없이 그대로 인정했고 구속된 6인의 간사는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대법원의 최종판결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의 공판은 근 1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 집행유예 혹은 무죄 등의 판결로 구속자들은 석방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눈에 박힌 가시


6인의 간사가 구속된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은 어느 순간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다. 이미 그러한 사건을 예고하는 전사가 존재한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전신은 1959년 강원룡 목사의 주도로 결성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이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사회과학자 가운데 크리스챤 신앙을 지닌 이들, 이렇게 약 30여 명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이른바 전선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을 목표로 두었지만 주로 이들의 활동은 학술적인 분야에 국한되어 있었다. 초기의 회원들은 일정한 토론 장소도 없이 회비 100원을 가지고 와 70원은 국밥을 사 먹고 나머지 30원으로 경비를 충당하며 토론을 했다. 답답한 시국과 더불어 열린 토론의 장을 목말라하던 이들에게는 그나마 이 단체는 한 모금의 냉수와 같은 것이었다.
1962년 8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열린 유럽 기독교사회운동기관협의회 회의에 참가한 강원룡 목사가 독일인 에버하르트 뮬러 박사로부터 무조건적인 후원을 약속받으면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는 활동 영역을 넓힐 전기를 마련한다.




특히 1965년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에 걸쳐 용당산 호텔에서 열린 ‘한국제종교의 공동과제’ 대화 모임은 비록 기독교 내부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불교, 천도교, 유교, 원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6대 종단의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모여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고 사회문제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모임이었다. 이 역사적인 모임은 1965년 5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가 재단법인 크리스챤 아카데미로 탈바꿈한 뒤 처음으로 일궈낸 쾌거였던 셈이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수난은 1970년대에 들어서 가시화된다. 1975년에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내일을 위한 노래집’을 발간한다.
이 노래집에는 번역된 외국가요를 비롯해, 수집한 노래, 새로 만든 노래 등 모두 129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운동권에서 이 노래집에 수록된 노래를 즐겨 불렀고 이 때문에 검찰은 노래집을 압수하였으며, 문제되는 노래를 삭제하여 비매품으로 하는 조건을 걸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또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11월 월간 『대화』를 창간한다. 월간 『대화』는 당시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잡지였다. 일반 노동자의 수기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비롯해 ‘무등산 타잔’과 같은 글이 실렸다. 여타의 잡지들이 주로 지식인들의 글로 지면을 채우는데 비해, 월간 『대화』는 일반 노동자를 비롯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회활동가들의 글로 지면을 채웠다. 그래서 노동현장과 생활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여과 없이 잡지에 실릴 수 있었다.
언론부재의 시대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밝히는데도 이 잡지는 한몫 톡톡히 했다.

그러나 월간 『대화』는 당국으로부터 수차례의 경고를 받은 끝에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7년 10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다.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교회, 여성, 산업, 청년, 농촌의 영역에서 중간집단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중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잘 짜여진 틀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1차, 2차, 3차에 걸쳐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는데, 집중교육을 비롯해 실습기간, 현장실험의 과정을 거쳐야만 모든 교육과정이 끝난다. 이처럼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므로,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이 프로그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결국 ‘내일을 위한 노래집’ 사건을 비롯해, 월간 『대화』의 폐간 등 1970년대에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겪게 되는 모든 사건들은 이미 그 곳이 박정희 정권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연장선상에 1979년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 놓인 것이다.

대화의 정신


수유리 4·19 국립묘지 입구를 지나면서부터 이차선 도로는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지난 가을 새로 정비했다는 구릿빛 가로등에는 3·1절에 내건 태극기가 여전히 걸려 있어 저 멀리까지 온통 태극기의 물결이다. 4·19 도로라는 가로명에 퍽 어울리는 풍경이다. 가풀막진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통일부와 통일교육원이 있고 그 곳을 지나치면 오른쪽에 북한산 국립공원 아카데미 매표소가 있다.


지금은 대화문화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꾼 크리스챤 아카데미 입구는 매표소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다. 계곡으로는 새봄을 알리듯 명랑한 소리를 내